- 사일지정 이후 if 세계관.

- 외관 및 설정은 원작 소설을 따릅니다.

- 운몽 강씨 일가 생존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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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s://posty.pe/1yj4d1








겨울이 닥쳐오기 전, 남망기는 운심의 정문을 두드린 숱한 사람 중 과거 기산 온씨의 의원이었다던 젊은 남매 둘만 받아들인 뒤 누구의 방문도 거절했다. 깎아놓은 얼음처럼 파리하던 위무선의 안색에 어스름한 붉은 기가 감돌고 목내이 같던 몸뚱이에도 손으로 집어 당길 살집이란 게 생겼을 무렵엔 이미 겨울의 복판이었다. 가뜩이나 한기 서린 몸에 북풍이 몰아닥치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남망기는 가을부터 방을 새로이 단장했다. 덕분에 겨우내 정실 문밖으로 나온 적이 손에 꼽을 횟수였던 위무선이 다시금 봄날 아래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을 땐 이미 멍울졌던 사랑이 무르익은 지 오래였다.

 

남망기가 위무선이 그간 심심풀이 삼아 끄적인 부적들을 모아 정실의 뒷마당에서 태우는 동안 위무선은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햇볕 아래 몸을 내어놓았다. 녹아내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안온이었다. 여전한 피마대효의 복식을 차려입은 남망기가 볼품없이 쪼그리고 앉아 기다란 나뭇가지로 불더미를 쑤시는 걸 지켜보던 위무선은 불현듯 그 위에 사방의 무덤을 죄 헤집고 다니던 시절의 저를 겹쳐보았다.

 

 

"…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고소로 갈 것을 그랬지."

 

 

남망기는 위무선이 회상하고 있는 과거의 지점을 정확하게 눈치챘다. 들어 올린 시선의 끝에 가늘하게 휘어진 눈매가 비쳤다. 위무선은 언제나 태양 같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달처럼 웃을 줄 알았다. 그렇게 웃으며 농치는 말에 신념이 앞서 따스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제 과거가 몹시 원망스러워 흐려진 눈빛을 우수에 젖게 만들면서도 남망기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위무선을 끌어안았다.

 

손가락이며 손바닥에 어설프게 묻은 잿가루가 검은 옷 위에 새삼 어두운 흔적이라도 덧씌울까 몸만 숙여 상체를 겹치고 마루 위에 손을 짚어 상대를 가두자 안기보다는 안겨든 모양새에 위무선이 대신 팔을 들어 너른 등판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이리 어리광이 많아서 어째. 나 없을 적엔 누굴 안고 살았기에. 남망기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남망기의 생에 위무선 이전에는 어떤 사람도 없었음을 이미 저도, 위무선도 잘 알고 있었다.

 

향후 십 년을 점치기 어려웠던 수명도 아마 남망기와 함께 보낸 두 계절만큼은 늘었으리라. 남망기는 차근히 위무선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가 돌보지 않으니 이제 그것 당연히 제 몫인 일이라. 도려란 말에 걸맞게 어디든 나란히 설 각오를 마친 뒤에도 부디 삶의 길이만은 저를 따랐으면 했다. 금단. 그까짓 게 무어라고. 수선하지 않는 평범한 필부들도 혼롓날엔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바이거늘. 불멸보다 조금 짧은 생을 가졌다 해서 한탄으로 지새우기엔 아까운 시간이었다. 애끓는 절망과 들끓는 전란이 거두어진, 이 평화로운 시절의 하루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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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따사롭고 바람이 온화하던 어느 날에, 위무선은 남망기와 함께 운심부지처의 뒷산을 올랐다. 호흡이 부족하면 멈춰 섰고 다리가 아프면 주저앉았다. 업혀 가고 싶을 땐 업혀서 갔고 그러다가도 불같은 변덕이 일어 두 발로 걷고 싶거든 발버둥을 쳤다. 일생에 버려지지 않을 동행이 있으니 떼쓰고 매달리는 일에 가감을 두지 않았다. 다만 그 곡절마다 나직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함께했다.

 

고소의 험준한 산세 중에서도 가장 야트막한 동산을 골랐음에도 정상까지 닿는 길은 고되었다. 마침내 초목이 자리를 비워준 둥근 공터에 도달한 위무선은 한 발자국 뒤에 남망기를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 세 명의 여인을 불러냈다. 고운 얼굴에 반투명한 미소를 미끄러트린 여인들은 바람이 불어도 옷자락이 나풀거리지 않았다. 그 하나하나의 면면을 자세히 보아 살펴준 위무선은 가볍게 노래하듯 말했다. 인제 그만 떠나야지. 미풍 앞에 부동으로 정렬해 있던 음령은 저들끼리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공자께서는, 남으실 건가요?"

 

 

그 말을 들은 남망기는 새벽을 부수는 여명보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 다가와 한팔로 위무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단호한 완력과 맹렬한 소유의 증명 앞에 세 명의 여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 높여 웃다 한 몸처럼 공손히 절을 올리고 분분히 흩어졌다. 가을에 부스러진 낙엽을 타고 위무선의 그림자로 흘러들었던 한 많은 혼들은 봄바람에 눈 녹는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비명조차 없는 조용한 귀천歸天이었다.

 

좋은 날이었고, 아름다운 낮이었다.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 하나 없는 청명의 절기 앞에 위무선은 제 심장을 덮은 서리가 한 겹 더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내 삶을 가둔 것들 중 무엇이 남았나. 내내 붙들려 있던 발목이 어쩐지 가벼웠다. 기묘한 부유감에 하늘이 가까워 보였다. 시린 계절에 만나 같은 고독을 삼켜냈던 음령들을 따라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은 것은 오로지 허리를 안은 팔 때문이었다. 위무선을 망령에서 인간으로 돌려놓은 장본인은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을 읊는 것처럼 말했다. 위영.

 

 

"혼인하자."

 

 

화우花雨가 내리기엔 아직 이른 시절에 받은 청혼이었다. 위무선은 바람결에 살그마니 제 어깨를 타고 넘은 말액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우린 이미 영원을 약속했잖아. 그래도 부족해? 남망기는 입을 꾹 다물곤 제 순결을 희롱하는 얄미운 손을 단단히 겹쳐 잡은 뒤 아래로 끌어내렸다. 구속이 풀린 흰 비단끈이 길게도 흩날렸다. 내내 붙잡고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실수로라도 놓치기 어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랐다.

 

위무선은 마디가 불거진 사내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춰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도려의 귀여운 탐욕을 달랬다. 알았어. 네가 가져. 다 줄게. 어차피 이젠 너밖에 욕심내는 사람이 없는걸. 위무선의 목소리에서 여태 잔재처럼 남아있는 자학을 읽어낸 남망기는 엄중하게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나밖에 없어야 해. 결국 위무선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림자를 벗어던진 낮달은 태양에도 지지 않을 찬란을 자랑했다. 남망기는 위무선을 돌려세워 제 품에 안는 것으로 그 사랑스러운 광경을 세상 누구의 눈에서도 가렸다. 때마침 고소는 영산을 넘나드는 구름이 많아, 도려를 숨기기에도 적합한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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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에서 혼례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릉노조가 함광군의 곁에서 칩거에 들어간 지 꼭 반년만이었다. 온 수진계에 실금 같은 들썩임이 인 것은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운몽이 가장 동요했으나, 늘상 고요하던 운심부지처에 여러 상인이 오가고 시일이 점차로 흘러도 청첩장은 날아오지 않았다. 지금 고소에 혼례를 올릴 만한 인물은 남망기와 위무선이 전부일 텐데도.

 

함께 경사를 나누자는 청은 받지 못했지만 강만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물이 될 만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사 모았다. 그간 위무선이 부렸던 사치라고 해봐야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이 다였기에 취향을 알 수 없어 중구난방의 구색이었다. 그 값어치와 반비례해 마음은 자꾸만 허해졌다. 몇 개나 되는 상자가 방에 가득 차도, 명지창 너머로 스미는 옅은 햇빛에 갖은 보화가 눈이 부시도록 번쩍여도.

 

뚜껑이 열린 상자에 담긴 비단을 쓸어내리는 강만음의 눈에 벌건 핏발이 미약하게 서려 있었다.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는데 밤잠을 도통 이루지 못해 수사의 몸으로도 피로를 이기기 어려웠다. 강만음은 시간을 쪼개 살피러 온 예물들 중 붉고 검은 비단에 눈길이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했다. 자색을 기조로 삼은 운몽에서 유일했던 예외. 흑黑에 바탕을 두었으나 근간은 적赤이었다. 그 점만큼은 운몽의 대사형이 이릉노조가 된 이후에도 같아서, 겉으로 보기엔 검었어도 속에는 변함없이 붉은 심장을 품고 있었다. 그랬을 테다.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이유는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산의 봉우리가 신록으로 젖어 들 만큼의 시간이 흘러도 강만음의 심장을 파고든 얼음 조각은 고작해야 파편에 불과한 주제에 여태 녹지 않았다. 괴로움을 나눌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멀어져,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혼자였다. 강만음은 저마다의 갈 길을 찾아간 사람들 중 딱 하나,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내쫓기듯 떠밀려간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얇은 비단 위에 주먹으로 움켜쥔 자국이 남아 강만음은 들여다보고 있던 목함의 뚜껑을 닫은 뒤 그걸 바닥으로 내려두었다. 가치가 떨어졌으니 치우라고 할 생각이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상자의 미로를 뚫고 침상으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별당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땐 위무선은 언제나 이 위에 누워있었다. 맥없이. 기운 없이. 생기 없이. 없는 것이 그리 많았으니 이제사 무엇을 쥐여준대도 기쁘게 받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열어둔 창 너머에서 찰랑이는 호수의 수면 위론 푸릇한 연잎이 펼쳐져 있었지만 아직 꽃대는 솟지 않았다. 그 광경에 질리지도 않고 심장이 아팠다. 연못에 사는 게 연꽃뿐이었으랴. 위무선은 사방이 물로 가득 찬 연화오에서 홀로 말라 죽은 부평초였다. 연꽃조차 되지 못한. 그러나 위무선은 일찍이 제 삶을 눈물로 채워서라도 살아남고자 했다. 난세에 지옥에 떨어져 다시 지상으로 기어올라야 했던 그때.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사형이었다.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을 만치 총명하고 출중하던 형제였다. 그랬던 이가, 정말로 사도를 걷기로 결심했을 때 제 미래 하나 헤아리지 못했겠는가. 세상에는 역경을 알면서도 걸어야 할 길이 있었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해내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같은 재난을 겪어냈지만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었던 강만음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위무선의 삶이 결코 저보다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연화오가 불타고 식솔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칠 때, 그래도 제겐 위무선이 있었다. 화를 내고 울부짖고 때리고 원망하고 모든 것을 돌려내라고 소리칠 수 있는 대상이.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고, 위무선은 제 평생에 갚아야 할 은혜를 입은 은인을 잃었다. 저는 다정하던 누이를 잃었고, 위무선은 상냥하던 사저를 잃었다. 저는 집을 잃었고, 위무선도 갈 곳을 잃었다. 시일이 지나 환란이 물러가고 강만음은 부모와 누이와 집을 돌려받았지만 위무선은 무엇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가 잃어버린 것들 중, 아무것도.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한들 의미가 있을까. 위무선을 잃기 전엔 위무선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내가.

 

상념에서 빠져나온 시각은 야심했다. 반나절을 통째로 후회에 헌납한 강만음은 별당의 문을 닫고 나서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도 달도 사라진 그믐의 밤이었다. 강만음은 문득, 평소 달이 뜰 땐 그것을 몰라보았다가 어둠이 내린 후에야 달이 어디로 갔나 찾는 제 처지가 참으로 구차하다고 생각했다. 빛이 사라진 밤이 두려워 아마 오늘 밤도 잠들지 못할 성싶었다.

 

강만음은 처소로 돌아오며 부사를 불러 아까 제 손으로 망쳐둔 비단을 다시 사두라 일렀다.

그러나 끝내 운몽을 비롯한 어떤 세가에도 초청장이 가지 않았으니 그 전부가 부질없는 기대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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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라 함은 무릇 인륜지대사라. 그 격을 위해 남계인과 남희신이 몇 번이고 하객을 언급했지만 위무선이 원치 않았다. 기산 온씨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무렵에도 세간에서 신의라 칭송받던 온씨 의원의 실력에 힘입어 한결 몸이 편해졌지만 아직도 저를 배려하여 몸소 정실로 행차하신 고소 남씨의 종주와 큰어른이 물러간 이후 위무선은 제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남망기의 다리 위로 풀썩 허물어졌다.

 

 

"선문 명사 함광군과 사마외도 이릉노조의 결합인데 세상에 자랑할 게 무엇 있다고. 너와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남망기는 옅은 미소가 내걸린 얼굴을 문질러 이제는 제법 따스해진 체온을 나누며 위무선의 의사를 온전히 존중해주었다. 담장 너머의 세상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사는 위무선과는 달리 남망기는 여러모로 들은 것이 많았지만 그간 운몽 쪽에서 위무선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단 사실은 굳이 전해주지 않았다. 위무선이 묻질 않는데 뭐하러. 묵은 상처를 들추어 그에게 이해와 납득을 강요하긴 아주 싫었으니. 설령 화해를 도모한들 패인 상처에 새살이 돋지 않듯 상흔은 여전하리라.

 

비탄으로 지나간 세월을 갚아줄 수 있는 존재는 누구도 없었다. 저 역시 위무선에게 그러하지 않았던가. 이미 어쩔 도리 없이 늦어버린 것들이다. 더는 위무선이 조금의 거짓이라도 감내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남망기는 불가능의 가망을 잡고 심력을 쏟아 매달리느니 차라리 말끔히 지워내 버릴 요량이었다.

 

 

 

 

 

혼례식 당일에도 홍단을 드리운 운심부지처의 문은 굳게 닫아걸렸다. 백가의 사람이라면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명분과 체면을 모두 내던진 채 불청객의 오명을 덮어쓰고 달려간 강염리와 금자헌만이 간신히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초청받지 않은 다른 가문의 경사에 함부로 끼인다는 게 얼마만한 무례인지 다 알면서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으니.

 

강염리는 운몽과도, 난릉과도, 심지어는 청하와도 몹시 다른 분위기를 가진 고소의 심처 속으로 걸어가며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늘상 활기차고 밝게 웃으며 언제나 소란을 만들어내던 제 동생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제 동생을 마지막까지 품어준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 사실이 사무치도록 괴로웠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분명 있었을 텐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을 찾지 못해 기어이 이곳을 제 종착지로 삼아야만 했던 위무선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혼례복을 차려입은 위무선은 그간의 공백이란 없었단 듯 익숙하게 웃었다. 본래 위무선은 남망기를 만나기 이전에도 강염리의 앞에서만큼은 그늘을 잊었던 사람이었다. '사저' 하고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강염리는 난릉에서 고소까지 오는 내내 참았던 눈물을 울컥 쏟았다. 아선……

 

 

"어찌 이리 말랐어……"

 

 

오래 앓았던 몸이 쉬이 회복될 리 없으니 곤한 안색은 위무선 특유의 경쾌함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았다. 하물며 강염리의 섬세한 눈길 앞에서야. 위무선은 금자헌의 존재나, 제가 걸친 비단옷의 가치도 고려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허리를 숙여 강염리의 무릎에 이마를 대었다. 그동안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강염리의 고해에 위무선은 시원하게 웃는 낯으로 답했다. 제가 강징도 아닌데 뭘요. 그 대수롭잖다는 대답에 걸린 가시가 몇이나 되는지.

 

저는 운몽의 사람이나 운몽 강씨가 될 수는 없고, 그렇기에 이러한 대우 역시 당연한 것이란 여상함에 강건으로 버티던 강염리의 억장이 기어코 무너져내렸다. 아. 내가 조금이라도, 단 일 년만이라도 내 혼사를 미루었더라면. 반년이라도 더 동생들의 곁을 지켰었더라면.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허물어진 유대를 붙들어 세우기엔 너무 늦어버렸으니. 그러니 하다못해 웃는 얼굴로 보내주어야 했다. 오로지 그만을 위해 예비된 빛 속으로.

 

위무선은 눈을 감고 뺨을 쓰다듬는 강염리의 손길을 느끼며, 손가락이 스치는 자리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눈물은 못 본 척했다. 저도 사저의 혼롓날에 남몰래 눈물을 훔치지 않았던가. 마음이 약하고 다정한 사저라면 아끼는 동생을 남의 가문에 떠나보내는 날에 얼마든지 울 수 있었다. 하여, 일부러 그 눈물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이제는 묻지 않아도 괜찮았다. 

 

 

 

 

남망기와 위무선의 혼례에 참석한 외부인은 강염리와 금자헌뿐이었고, 강염리는 이미 출가하여 난릉의 사람이 되었기에 결국 운몽의 어떤 사람도 그 자리에 서지 못했다.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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